[박철수의 '거취와 기억']둘 곳 없어 밀어낸 '엄마의 단지'..'옹기종기' 그리운 풍경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2016. 3. 16.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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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골목길·마당과 함께 사라진 ‘장독대’

“누나 순(順)이 김칫거리를 씻고 있는 수돗간 뒤로 돌아, 대문 옆에 달린 장독대 위로 올라갔다. 광 위를 시멘트로 평평하니 다지고 가장자리에 쇠 울타리를 둘러친 장독대는 꽤 높다. 골목 안이 잘 보인다. 아니 맞은편 국민주택 블로크 담 안 화단까지 빤히 들여다보인다. 새로 이사를 와 아직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은 장독대 위에는 늦가을 햇볕이 하얗게 깔려 있었다.”

<오발탄>으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 이범선이 1968년 5월 ‘신동아’를 통해 발표한 단편소설 <문화주택(文化住宅)> 첫 장면이다. 집장수인 부모가 팔아치울 목적으로 후다닥 지은 서울 변두리의 ‘문화주택’으로 새로 이사온 초등학교 4학년 ‘동철’이 집 밖 골목길에서 동무를 부르는 또래의 소리가 궁금해 광 위 장독대에 오르는 모습이다. 서울 쌍문동 골목길 사람들의 얘기를 담은 <응답하라 1988>에서 정환·정봉 형제가 별똥별이 떨어진다고 예보된 날 저녁에 의자를 나란히 놓고 마음속 얘기를 나누었던 곳. 바로 그 장독대다.

사실 ‘독’이란 김치, 간장, 고추장 따위를 오랫동안 저장하기 위해 쓰이는 오지그릇이나 질그릇을 말한다. 항아리며 옹기를 모두 포함해 일컫는 말이니 ‘장독’은 간장, 된장, 고추장 등 장류를 담아두는 독이다. 여기에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김장김치를 담으면 김칫독이 되고 쌀을 저장하면 쌀독이 된다. 이들을 모아둔 곳이 바로 ‘장독대’다.

1958년에 건축된 3층 연립주택의 평면도. 당시 건축된 연립주택에는 장독대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 제공

■생활·소통공간이었던 장독대

이범선의 <문화주택>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독과 관련한 아주 흥미로운 조사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당시 서울에 있던 7가지의 서로 다른 아파트를 각각 50세대씩 골라 장독의 숫자를 조사한 것이다. ‘아파트 실태조사 분석’이라는 글에 등장한 내용으로, 1970년 조사 내용을 다룬 것인데 대한주택공사의 기관지 ‘주택’ 제27호를 통해 발표됐다. 당시 아파트는 전국적으로는 1%에도 미치지 못하는 0.77%였고, 서울로만 한정해도 3.9%에 불과했다. 전국적으로 1%에도 미치지 않는 아파트를 대상으로 각 세대가 보유하고 있는 장독의 숫자를 조사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조사결과 당시 가장 많은 숫자의 독을 보유한 경우는 공무원아파트로 세대별로 평균 12개 이상을 사용했고, 아파트 종류에 관계없이 평균 9개 이상의 독을 가지고 있었다. 크기별로 보면 작은 독은 공무원아파트가 가장 많아 평균 7개 이상으로 나타났다. 중간 크기의 독은 맨션아파트가 평균 4개, 가장 큰 독은 시민아파트가 평균 3개였다. 크기별로 독을 가진 숫자는 아파트마다 달랐다.

같은 조사에 나타난 또 다른 결과를 보자. 이번에는 아파트마다 사용하고 있는 독들을 어디에 두고 쓰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거의 대부분 발코니를 장독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부엌이나 마루(마루방 혹은 거실)에 두는 경우도 있었고, 응답자의 18% 정도는 설문지가 제시한 곳이 아닌 다른 곳에 두고 쓰는 것으로 답했다. 방에 두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조사는 아파트의 본격적인 확대 보급이 시작되던 시기라는 점에서 ‘아파트라는 형식’과 ‘생활이라는 내용’의 불일치에 대한 적지 않은 고민을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해 그동안의 보편적 주택 유형인 단독주택이라면 볕이 잘 드는 마당 한 귀퉁이에 장독대를 들이거나 이범선의 소설 <문화주택>이나 <응답하라 1988>에서처럼 대문간 위에 평평한 구조물을 만들어 얹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물론 추위가 닥치면 김장독을 장만해 마당 한 구석에 파묻거나 광에 두고 겨우내 가져다 먹으면 그만이었는데 아파트는 그 조건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고민이 적지 않았다.

이런 걱정은 1970년대에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 집의 체면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여겨졌던 장독대를 없앨 마땅한 방법이 없어 고심이라거나 혹은 단출한 생활을 위해서라도 장독 처리가 필요한데 지하실이나 지붕에 올리는 방법 역시 마땅치 않다는 지적이 전문가 대담이나 투고를 통해 지면에 자주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논란에 그치지 않았던 이유는 도시로 사람들이 모이며 3층 정도의 연립주택이나 2층 주택처럼 땅을 효과적으로 이용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장독 문제가 다시 ‘뜨거운 감자’가 되어서였다. 물론 2층 이상의 집을 짓더라도 위아래 모두를 한집이 사용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1층 적당한 곳에 장독대를 설치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2 국내 최초의 대단위 단지형 아파트였던 서울 마포아파트 전경. 정기용, <서울이야기>

■아파트 보급되며 사라진 장독대

1958년 9월에 작성된 부흥주택 평면도를 보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이 주택은 1층과 2층 모두를 한집이 사용하는 것으로 현관에서 바라보이는 욕실 밖, 부엌에서 오갈 수 있는 곳에 적당한 크기의 장독대를 따로 두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1층과 2층 혹은 3층을 각각 다른 세대가 살게 될 경우 1층을 제외한 다른 층에 들어가는 집의 장독대 두기가 골칫거리였다. 물론 적당한 방법이 마련되었다. 형식이 전제된다고 해서 생활이 그에 종속되는 것은 결코 아니고, 일상이란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학습된 것이기에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 또한 아니기에 그렇다. 지금 보아도 아주 지혜로운 방법이 궁리됐다.

계단을 통해 2층 혹은 3층으로 올라오면 만나는 계단참을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 세대가 나뉘는 것은 요즘의 아파트와 다를 것이 없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어느 집이나 왼편 혹은 오른편에 변소가 위치하고 현관 반대 방향으로 현관 크기의 2배 정도 넓이의 장독대가 자리한 것이다. 장독대는 바닥으로부터 60㎝ 정도의 높이로 난간이나 울을 두르고 그 안에 독이며 항아리를 두는 방식이다. 베란다와 같은 방향에 장독대가 놓인 것으로 보아 볕 좋은 자리에 장독대를 두었음이 분명하다. 괜한 걱정을 해 본다면 간장, 된장 혹은 고추장의 경우와 달리 김칫독의 경우 외기에 노출되었던 까닭에 숙성이 너무 빨라 새봄이 오기 전에 시어 터진 김장김치를 먹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서울 여의도시범아파트에는 복도에 잇대어 별도의 장독대 공간이 있었다. 박철수 제공

그렇다면 3층 연립주택이 지어지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중앙산업에 의해 건설된 종암아파트와 개명아파트는 어땠을까. 베란다의 한쪽 귀퉁이에 1.5㎡ 정도 크기의 공간을 마련하고 여닫이문을 달아 ‘광’을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물론 이것으로는 평균 9개 이상의 독이나 항아리를 가졌던 모든 세대가 쓸 수 있는 장독대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일부 옹기며 항아리는 불편하더라도 마루방에 두거나 부엌 귀퉁이에 두고 사용하는 등 생활과 형식의 불일치를 감내했다.

한국 최초의 대단위 단지형 아파트로 불리는 마포아파트의 경우는 어떨까. 물론 장독대 공간을 특별하게 고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 5년쯤 전에 지어진 종암아파트나 개명아파트보다 장독 공간에 대한 배려는 없어 보인다. 베란다의 귀퉁이마저 장독을 두는 공간으로 할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파트 입주자들은 이른바 ‘문화생활을 보장하는 문화주택’으로 거처를 옮겼다지만 항아리며 장독들을 둘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제각각 궁여지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마포아파트 입주 후 그들의 생활이 밖으로 드러난 사진은 당시 형편과 상황을 잘 설명한다.

상당수가 발코니 창살 밖으로 별도의 철제 난간을 매달고 그 위에 옹기며 작은 항아리를 내놓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빨래를 널어 말리는 장치 역시 같다. 그렇지 않은 집은 아예 밖으로 면한 발코니 바깥으로 창을 내달고 그곳을 실내공간으로 바꿔 사용했다. 당연하게도 장독들은 그 안 어딘가에 웅크리고 앉았을 것이다. 이런 모습에 대해 당시 마포아파트 입주민들 사이에 불만이 적지 않았고 공무원이나 전문가들조차 아름답지 못한 풍경이라고 비난하며 바람직한 문화생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혹평을 쏟아냈다. 요즘 고가 아파트의 경우와 다를 게 없다.

금성사의 1984년 김치냉장고 신문 광고.

■장독대를 대체한 김치냉장고

다시 ‘아파트 실태조사’가 이루어진 1970년대로 돌아가보자. 1970년대는 1960년대와 달리 아파트 공급이 본격 시작된 때이다.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사고로 안타까운 인명 손실이 있었고, 그로 인해 서울의 경우 시민아파트 건설이 중단되고 김현옥 서울시장이 책임을 지고 시장직을 사임하는 등의 일이 있었지만 외형적으로 아파트가 많이 보급됐다. 서울의 강남 개발이 시작되었고, 광주대단지 주민 소요사태를 거치며 아파트가 중산층을 위한 도시주택으로 자리매김하던 때이다. 여의도시범아파트가 국내 처음으로 12층의 고층으로 건설됐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장독대 숫자는 여의도시범아파트가 지어질 당시 형편을 말해주는 것이었으니 과연 어땠을까.

매우 진기하고도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중산층을 위해 건설한 한강맨션아파트나 반포주공아파트와 달리 여의도시범아파트는 승강기를 갖춘 고층아파트이기 때문에 별 수 없이 한편으로 복도가 길게 달린 ‘판상형 아파트’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 베란다는 거실(혹은 거실·식사공간 통합) 폭만큼만 주어졌다. 그 전의 종암, 개명, 마포아파트 등과 달리 베란다 공간조차 넉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복도에 잇대어 별도의 장독대를 두는 묘안이었다.

아파트 실내에 들어가려면 복도에서 낮은 계단 두 개를 올라야 하는데, 계단 두 단 높이로 장독대의 턱을 두고 턱을 따라 철제 난간을 두르되 장독대 바닥은 그보다 한 단 낮춰 오목하게 장독대를 두는 방법이었다. 거실 반대편 복도 방향에 장독대를 두었으니 직사광선은 피할 수 있었겠지만 햇볕을 받기에는 좋은 위치가 아니었다. 다만 앞서 비난받았다고 하는 아파트 풍경은 마포아파트의 경우와 사뭇 달랐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의도시범아파트의 장독대는 거의 모두 유리 덧문을 달아 개별 세대의 허드레 물건을 내놓거나 계절 용품을 보관하는 장소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그 많던 항아리와 오지독은 어디로 갔을까. 형식이 생활을 지배한 까닭인지, 아니면 생활의 변모가 형식을 바꾼 것인지를 단정하기 어려우나 장독대를 둘러싼 고민은 이제 말끔히 사라졌다. 아파트의 대량공급과 단출한 생활의 학습으로 인해 장을 담가 먹는 집이 절대적으로 줄었고, 김장을 담그는 집도 적어졌다. 한때는 실내공간에 별도로 만들어진 주방보조공간인 ‘다용도실’이나 전면 폭으로 주어진 발코니의 일부가 장독대 기능 일부를 대신했지만 이마저도 발코니 확장으로 사라졌다. 쌀독은 당연하게도 싱크대 아래 좁은 서랍으로 들어왔다. 발코니를 막아 사용하던 공간은 합법적 확장을 거쳐 아예 실내공간이 됐다.

널찍한 실내공간 적당한 곳에 김치냉장고가 놓여 사시사철 신선한 김치를 즐길 수 있게 됐고, 간장이며 된장, 고추장은 ‘만들어 먹는 것을 사 먹게 한다’는 식품업계의 상품 전략이 맞아떨어졌다. 생활은 남았지만 거추장스럽다 여긴 형식은 홀연히 사라졌다. 당연하게도 ‘쌀독에서 인심 난다’거나 ‘틈 난 돌이 터지고 태 먹은 독이 깨진다’는 속담도 더불어 사라졌다.

■독·항아리·김치냉장고■독 간장, 술, 김치 따위를 담아 두는 데 쓰는 큰 오지그릇이나 질그릇.



■옹기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통틀어 이르는 말.



■오지그릇 붉은 진흙으로 만들어 볕에 말리거나 약간 구운 다음 오짓물을 입혀 다시 구운 그릇.



■질그릇 잿물을 덮지 않고 진흙만으로 구워 만든 그릇. 겉면에 윤기가 없다.



■항아리 아래 위가 좁고 배가 부른 질그릇. 큰항아리는 높이가 50㎝ 이상인 항아리.



■최초의 김치냉장고 김치냉장고는 1984년 금성사와 대우전자가 처음 출시했지만 ‘김치는 항아리에 보관하는 것’이라는 소비자들의 거부감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1994년 만도기계에서 김치의 옛말로 알려진 ‘딤채’를 출시하면서 시장 판도를 뒤흔드는 히트 상품이 됐다. 물론 지금은 거의 모든 가전업체가 김치냉장고를 생산·판매한다.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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