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수의 '거취와 기억'](5) '응팔' 정환의 집처럼..구별짓기 경쟁이 낳은 부잣집 상징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2016. 5. 12.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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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미니 2층 양옥’의 발자취

1978년 ‘뿌리깊은 나무’ 9월호에는 불문학자 김현의 흥미로운 글이 실려 있다. ‘알고 보니 아파트는 살 데가 아니더라’는 제목이 붙은 이 글에서 그는 ‘아파트가 하나의 거주 공간이 아니라 사고 양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며 처음 문패를 달았던 서울 연희동 단독주택에서 여의도시범아파트에 전세를 들게 된 사연을 밝혔다.

마흔 평 남짓한 땅을 구입해 스무 평짜리 집을 짓고 1년을 제법 편안하게 지냈는데 그 뒤 이른바 ‘미니 2층’이라 불리는 양옥집들이 들어서며 자신의 집은 햇볕도 거의 들지 않는 난쟁이집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집안의 눅눅함을 견디기 어렵고 경제적인 이유도 겹쳐 집을 내놓은 지 반년 만에 어렵사리 단독주택을 처분하고 여의도아파트 스물두 평짜리로 전세를 들게 됐다는 얘기다.

드라마 에 나온 정봉·정환이네 집 세트. 1970년대에 많이 지어진 ‘미니 2층’으로 불린 양옥집이다.

■‘미니 2층’으로 불린 양옥

이른바 ‘미니 2층’이라 불리는 양옥집 하면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시작 화면으로 자주 등장했던 ‘정봉·정환 집’ 세트다. 이런 풍경에 대해 건축가 윤승중은 ‘1970년대 양식’이라 부른 뒤 “남쪽 정면만은 늘 화강석 돌붙임을 하는 것이 거의 신앙처럼 되어 있는 것, 집 주변에 콘크리트 난간을 장식처럼 붙이는 것, 기와 주변에 투박한 콘크리트 흉장을 두르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라고 꼬집었다. 여기에 보태기를, 도회뿐만 아니라 새마을운동의 일환인 농촌주택 개량사업을 통해서도 이런 기이한 풍경이 널리 퍼지면서 얄궂게도 미니 2층, ‘불란서식 지붕’ 등 기괴한 유행어까지 만들어낸 바 있다고 아쉬워했다. 당시 발표된 가수 남진의 노래 ‘님과 함께’에 등장한 ‘그림 같은 집’이 대강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까.

김현이 보았던 ‘미니 2층 양옥집’에 윤승중이 지적한 ‘불란서식 지붕’이 보태지며 1970년대의 주택양식은 ‘불란서식 미니 2층’으로 자리 잡는다. 프랑스에도 없는 ‘불란서식’이라는 형용어가 집 앞에 붙은 까닭은 세련미와 더불어 이국적이고 고급스러운 그 무엇을 지시하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당연히 서양이고 그림 같은 집이 있는 곳으로 상상되었으니 ‘양옥’을 빼고 ‘불란서식 미니 2층’ 하면 욕망의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런 집을 지을 수 있는 부류는 상대적으로 많은 재물을 가져야 했으니 ‘부잣집’을 표상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러니 누가 더 많은 재물을 가졌는가와 누구의 취향이 훨씬 더 고급스러운가를 나타내기 위한 ‘구별짓기’ 경쟁이 지붕의 꼴이며 창문의 형상으로 과장되며 1970년대를 풍미했다.

서울 성북구 정릉 일대의 재건주택 단지. 주명덕, (70쪽)

그렇다면 왜 ‘온전한 2층’이 아닌 ‘미니 2층’이었을까. 당연하게도 당시의 주택수급 사정과 가정경제 형편 때문이다. 1970년대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7.2~14.8%를 기록했고, 1975년을 기준으로 할 때 서울의 주택보급률은 56.3%였지만 1980년에 오히려 56.1%로 낮아졌다. 주택건설촉진법이나 아파트지구와 같은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 집을 늘려도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도회로 몰려든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몸을 의탁할 거처가 필요했고,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으니 주거공간을 이용한 임대수익은 중요한 재산 축적 수단이 되었다. 결국 지하와 지상에 각각 반씩 걸친 반지하층을 만들어 세를 들이고, 주인집은 그 위에 한 층을 점유하는 것이 보편화된 것이다. 꿩 먹고 알 먹는 셈이다. 그러니 그 모양이란 것을 온전한 2층이라 할 수 없고 달리 부를 방도가 마땅치 않아 생겨난 것이 ‘미니 2층’이다. 정봉·정환 집이자 그 아래 세들어 사는 덕선네 집이기도 한 <응답하라 1988>의 시작 화면이 말하려는 것이다.

‘불란서식 미니 2층’으로 불리는 1970년대 양식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그 모양이며 내용이 가장 변하지 않은 것이 집이라는 사실은 그 이전의 것으로부터 매우 뛰어난 유전적 형질을 이어받은 상태에서 새로운 여건에 따라 아주 조금씩 형질이 바뀌거나 새것이 보태진 느림보 양식이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일대의 고급 단독주택 단지. 주명덕, (43쪽)

■일제 때 ‘문화식 주택’이 양옥으로 변모

건축역사학자 전봉희는 “한옥과 양옥은 개항과 함께 서구의 건축이 전래된 이후 재래의 건축과 외래의 건축을 구분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용어”라고 설명하면서 이 가운데 양옥이 본격적인 모습을 갖춰 등장한 시기를 1960년대 이후로 잡고 있다.

그는 돌집(연와건·煉瓦建)이나 양철지붕집(양철즙·洋鐵葺) 혹은 2층집(2계건·二階建) 등 사례를 들어 ‘양옥’이 전래된 것은 이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판단했지만 벽돌이나 시멘트 블록으로 벽체를 올리고 트러스로 지붕틀을 짜 그 위에 시멘트 기와를 올린 보통의 ‘양옥’이 ‘조선가옥(한옥)’을 빠르게 대체한 시기는 1960년대로 보고 있다.

당연하게도 1960년대는 1950년대를 딛고 있다. 1950년대라면 6·25전쟁의 참화를 복구하기 위해 부흥과 재건에 힘쓰던 때였고, 정부 시책과 유엔 등의 원조에 의해 구호주택이나 국민주택, 외인주택 등이 등장한 시기였다.

남아프리카에서 흑벽돌 제작기구를 들여와 750달러에 집 한 채를 지을 때였고, 재건주택, 희망주택, 부흥주택, 운크라(UNKRA) 주택 등의 이름을 딴 양식주택들이 보급되던 시절이었다.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던 김원일의 장편소설 <마당 깊은 집>은 이렇게 끝맺는다. “학교와 대구일보사로 맥 빠진 채 나다니던 4월 하순 어느 날, 나는 마당 깊은 집의 그 깊은 안마당을 화물트럭에 싣고 온 새 흙으로 채우는 공사 현장을 목격했다. 내 대구 생활의 첫 일 년이 저렇게 묻히고 마는구나 하고 나는 슬픔 가득 찬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굶주림과 설움이 그렇게 묻혀 내 눈에 자취를 남기지 않게 된 게 달가웠으나, 곧 이층 양옥집이 초라한 내 생활의 발자취를 딛듯 그 땅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6·25전쟁 직후인 1953~1954년의 풍경이다.

그러니 소설에 등장하는 ‘이층 양옥’이란 아마도 전쟁 피해 복구와 구호를 위해 정부와 공공기관이 적극 공급한 2층짜리 ‘재건주택’이거나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 현장을 시찰한 바 있는 ‘부흥주택’이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당시 구호용 주택의 많은 경우가 집 안에 화장실을 갖춘 2층으로 지어졌고, 서양식의 트러스 구조를 채용해 기와를 얹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를 설명할 수 있는 다른 기록을 살펴보자. 대한주택공사가 1971년 4월 한 달 동안 주택센터를 방문한 무주택자 100명을 대상으로 주택 취향을 조사한 결과인데, 그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

설문에 응답한 100명 가운데 양옥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는 ‘문화식 주택’을 원하는 경우가 91%를 차지하고 있는데, 구운 기와, 시멘트 기와, 석면 슬레이트 등을 지붕재료로 원한다는 대답이 86%에 이른다. 이는 당시 응답자 대부분이 기와나 슬레이트를 얹은 경사지붕을 가진 집을 ‘문화식 주택’으로 불렀고 이를 누구나 쉽게 이해했다는 것이다. 결국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기의 서양풍 주택을 일컫던 ‘문화주택’이 보편적으로 사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소개된 이른바 ‘문화주택’이 1950~1960년대를 거치며 ‘문화식 주택’으로, 다시 1970년대에 ‘양옥’으로 변모했다고 볼 수 있다.

안석주가 1930년 4월14일자 조선일보에 게재한 만화. 유행과 허례를 좇아 서양풍 단독주택인 문화주택을 취하려다 오히려 큰 화를 입는 당시 세태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음속에 그린 ‘붉은 벽돌 2층 양옥’

시간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석영 안석주가 1930년 4월14일 조선일보에 게재한 만화 한 컷을 살펴보자. 고약하게 생긴 사람이 대부(貸付)라고 쓰인 긴 쇠사슬로 서양풍의 2층짜리 교외주택을 옭아매고 있는데 그 안의 잉꼬부부는 나 몰라라 하며 스위트홈을 즐긴다는 삽화다.

유행과 허례를 좇아 서양풍 단독주택인 문화주택을 취하려다 오히려 큰 화를 입을 수도 있다는 당시 세태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즘 사회문제로 등장한 가계부채나 ‘하우스 푸어’에 대한 걱정과 다름 아니다.

“요사이 걸핏하면 여자가 새로 맞이한 사나이를 보고서 우리도 문화주택에서 재미있게 잘 살아보았으면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쥐뿔도 없는 조선 사람들이 시외나 기타 터 좋은 데다가 은행의 대부로 소위 문화주택을 새장같이 거뜬하게 짓고서 스위트홈을 삼게 된다. 그러나 지은 지도 몇 달 못 되어 은행에 문 돈은 돈대로 날아가 버리고 외국인의 수중으로 그 집이 넘어가고 마는 수도 있다. 이리하여 문화주택에 사는 조선 사람은 하루살이뿐으로 그 그림자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문화주택(文化住宅)이 문화주택(蚊禍住宅)이다”라는 냉소적 글이 그림 설명을 보탠다.

일제강점기에 서구 문명과 생활의 표상으로 자리한 문화주택은 1960년대 중반에도 여전히 건재했다. 1963년부터 1964년에 이르는 8개월 동안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던 손창섭의 장편소설 <인간교실>의 한 대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주인갑이라는 소설 속 인물은 자유당 시절에 비닐 무역업으로 돈을 벌어 자기 집을 지었는데 한강이 눈 아래 굽어보이고 아카시아숲이 절경을 이룬 곳 70평의 대지 위에 빨간 벽돌벽에 청록색 기와를 얹은 단독주택이다. 새뜻하고 이채로운 외풍을 갖춘 문화주택으로 설명한다.

이 집은 주인이 손수 지었는데 눈이 부시도록 하얀 페인트를 문틀마다 바르고 장문에는 화려한 색깔에 무늬가 장식된 커튼을 드리우게 했다는 것인데, 당시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이미지가 담겨 있었는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붉은 벽돌’이 보태진 것이니 ‘불란서식 미니 2층’과 더불어 ‘붉은 벽돌 2층 양옥’은 곧 우리들이 ‘마음속에 그린 집’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소통 거부하는 ‘자폐단지’, 타운하우스

그렇다면 ‘불란서식 미니 2층’은 어떻게 변했을까. 당연하게도 그곳은 차츰 다세대·다가구주택으로 모양을 바꾸고 몸집을 불려 더 많은 세입자를 수용하는 고밀주택으로 변모했다. 층을 높이고 바닥면적을 늘린 원래의 주인이 맨 위층을 차지하는 경우도 많지만 일부는 세입자들만이 북적대는 고밀도 임대주택으로 남겨졌고, 원래의 집주인은 마음속에 그린 또 다른 집을 찾아 거처를 바꾸었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마음속에 깊이 품었던 온전한 2층집으로서의 ‘붉은 벽돌 2층 양옥’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소위 ‘빌라’로 먼저 모습을 바꾸었고, 아파트에서 편리함과 쾌적함을 누렸던 다른 부류는 한때 큰 유행이었던 전원주택을 대신한 ‘타운하우스 붐’에 힘입어 아파트의 권태를 보상받는 방법을 택했다. 민간 건설업체들의 발빠른 주택상품 전략이 이들을 빨아들인 것이다. 물론 최근 대도시 주변지역에 터를 잡아 마당을 가진 단독주택을 짓거나 서로 어울려 ‘땅콩주택’을 마련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 또한 유사한 움직임이다.

마음속에 그린 집은 누구나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 소망을 실천할 수 있는 부류가 지극히 한정됐다는 것이 아쉽다. ‘빌라’로 불리는 고급 연립주택이나 누구와도 부대끼지 않는 단독주택의 고즈넉함에 더해 아파트의 편리함과 쾌적함을 두루 갖춘 ‘타운하우스’는 소통을 거부하는 ‘자폐단지’로 만들어진다. 구별짓기만을 위한 철저한 구획논리와 구획된 공간을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도록 치밀하게 가두는 자폐주의가 ‘마음속에 그린 집’의 온당한 결과일까. 집이 아니라 동네,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소통하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야말로 지금 마음속에 그려야 하는 풍경이다.

■‘빌라’와 ‘타운하우스’‘빌라’와 ‘타운하우스’는 단독주택이나 다세대주택 등과 달리 어떠한 법적, 제도적 정의도 없는 흥미로운 호칭이자 용어다. 거칠게 풀이하자면 부동산시장이 만들어낸 기형적 용어일 뿐인데 빌라는 고급 연립주택을, 타운하우스는 고급 연립주택이거나 고급 다세대주택을 뜻한다.



다만, 이들을 연립주택이나 다세대주택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주택시장에서 서열화돼 있는 기존의 연립주택이나 다세대주택과 다른 ‘상품’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다세대·다가구주택의 별칭으로 부르곤 하는 ‘가든’ 역시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세대주택이거나 다가구주택인 것과 같은 이치다.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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