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조항 있어도 처벌 못하는 '실내공기질법'

송진식 기자 2017. 6. 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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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소비자들이 유해 화학 소재를 사용하지 않는 신공법으로 ‘새집증후군’을 해결한 한 가구업체의 드레스룸 전시관을 살펴보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지난해 5월 집을 새로 구매한 ㄱ씨(37)는 300만원을 들여 오래된 화장실을 새로 수리했다가 낭패를 봤다. 수리를 맡은 업체는 “좋은 자재로 시공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수리를 마친 화장실에서는 내부 타일 부착 등에 사용되는 접착제(타일본드) 냄새가 너무 심했던 것. 시큼하고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는 탓에 환풍기를 틀어도 화장실 문을 열어놓지 않고서는 단 1분도 있기 어려웠다. 업체에 항의하자 “원래 공사 직후에는 냄새가 난다. 일주일 정도면 빠진다”는 답이 돌아왔지만 냄새가 다 빠지기까지 6개월이 넘게 걸렸다. ㄱ씨는 그 기간 중 안방에 딸린 작은 화장실을 써야 하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문제의 원인은 시공업체가 저가의 타일본드를 사용한 탓이었다. ㄱ씨처럼 건축자재의 품질이나 등급 등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부족한 일반소비자들을 위해 정부는 2016년 12월 ‘실내공기질관리법’을 제정해 시행 중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실내용 건축자재 6종에 대해 유해성 등을 사전심사해 통과된 제품만 판매할 수 있도록 한 게 주요 골자다. 하지만 법이 실효성을 갖도록 하는 처벌조항은 시행 1년 뒤인 올해 연말부터 적용되도록 한 탓에 벌써부터 ‘유령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실내공기질은 집 주변의 라돈 수치나 미세먼지 등 대기오염물질 등의 영향을 받지만 공기질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내부 건축자재들이다. 실내 건축자재로 쓰이는 벽지나 장판, 접착제, 실란트 등의 상당수가 석유화학계 제품을 쓰다보니 새집증후군의 주요 원인물질인 포름알데히드, 발암성 물질이 다수 포함된 휘발성유기화합물(VOCs) 등이 자재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특히 최근 들어 유해성이 심각한 것으로 밝혀진 휘발성유기화합물의 경우 호흡곤란이나 피로감, 두통 등 단순 증상부터 중추신경계 교란, 정신착란, 면역계 이상 등 중증질환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들 유해물질은 연구결과에 따라 시공 후 최장 6개월 이상 배출이 지속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해물질로 인한 피해를 줄이는 방법으로 빈 집을 덥게 데워 환기시키는 ‘베이크아웃’ 등의 방법이 제시되기도 하지만 집을 비울 새 없이 입주해야 하는 입주민들에게는 소용없는 일이다. 유해물질 배출이 최대한 덜한 친환경 자재를 사용하는 게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이지만 실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문제다.

감사원이 지난해 5월 공개한 조사결과를 보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발주해 건설한 아파트에 사용된 실내 건축자재 4개 중 1개가 친환경 기준을 초과한 것으로 나왔다. 조사대상인 벽지와 접착제 23개 중 벽지 3개, 접착제 3개 등 6개가 기준을 초과했다. 한 벽지는 기준의 14.6배가 넘는 오염물질을 배출하기도 했다. 서울시가 매년 조사하는 ‘신축 공동주택 실내공기질’ 실태를 보면 2008년부터 2013년 8월까지 조사대상 195개 신축 아파트 중 51곳에서 기준치를 초과하는 오염물질이 확인됐다. 국립환경과학원이 2004년부터 2012년까지 국내에 시판된 실내 건축자재 3350개의 오염물질 방출량을 조사한 결과 약 7.7%에 해당하는 257개 제품이 기준을 초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하철 등과 같은 지하시설이나 다수가 이용하는 다중이용시설의 경우 1996년에 ‘지하생활공간 공기질 관리법’, 2003년에 ‘다중이용시설 등의 실내공기질 관리법’ 등이 차례로 제정돼 그나마 관리를 받았지만 신축 공동주택의 경우 오랜 기간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실내공기질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자 국회는 2015년 실내공기질법을 제정해 본회의를 통과시켰다. 이후 공포기간 등을 거쳐 실내공기질법과 관련 시행령·규칙이 지난해 12월 23일부터 전면 시행에 들어갔다.

새로 제정된 실내공기질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조항은 ‘건축자재 사전 적합확인제도’다. 실내공기질법에서는 다중이용시설이나 공동주택(100세대 이상 500세대 미만)을 신축하려는 설치자는 건축자재가 기준을 초과한 오염물질을 방출하지는 않는지 시공 전 사전에 확인해야 한다. 건축자재를 제조하거나 수입해 유통하는 공급자의 경우 정부가 지정한 인증기관에서 사전시험을 통해 해당 건축자재가 오염물질 배출 기준 이하의 안전한 자재임을 입증한 뒤 공급하도록 의무화했다. 적용대상 건축자재는 벽지, 바닥재, 페인트, 실란트, 퍼티, 접착제 등 6종이다.

처벌기준도 과거 과태료 부과에서 벌칙 수준으로 강화해 건축업자가 규정을 어길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도록 했다. 자재 공급업자가 규정을 어길 경우에는 2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받게 된다. 환경부는 당시 보도자료에서 “법 개정을 통해 실내공기질 관리에 필요한 많은 부분을 보완해 선진 관리체계를 갖추게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 시행 반 년이 지나도록 규정을 어긴 업체를 적발한 건수도, 적발돼 처분이 내려진 경우도 전혀 없다. 정부가 법을 시행하며 마련한 처벌조항에 대해 “업계가 적응하고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한다”며 1년간의 유예기간을 둔 탓이다. 처벌조항이 적용되는 시점은 2017년 12월 28일부터다. 쉽게 말해 올 연말까지는 인체에 유해한 수준의 물질을 내뿜는 실내 건축자재를 마음껏 써서 집을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셈이다.

한 페인트 업체 관계자는 “제도 도입 전 환경부 홍보자료를 보면 법 시행 이전에 제조·유통된 제품에 한해 1년의 유예기간을 준 것으로 돼 있었다”며 “중간에 슬그머니 모든 제품에 유예기간을 주도록 규정을 바꾼 것”이라고 말했다.

처벌이 유예되는 동안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다. 법 시행을 이유로 그나마 환경부가 실시하던 건축자재 유해성에 대한 사후조사도 지난해부터 중단된 상태다. 국립환경과학원은 매년 50개의 실내 건축자재를 무작위 선정해 유해물질 배출 수준을 검사한 뒤 기준치를 초과하는 제품은 사용을 중단하도록 제품명 등을 공개해 왔다. 국립환경과학원 관계자는 “실내공기질법에 건축자재 사전 적합확인제도가 도입되면서 2016년부터 조사를 중단했다”고 밝혔다.

건축자재 사전 적합확인제도의 적용 대상을 놓고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건축업자의 경우 100세대 이상 공동주택을 신축하는 경우에만 해당 조항이 적용된다. 100세대 미만의 다세대나 연립주택의 경우 건축업자가 기준치를 초과하는 실내자재를 써서 시공해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안되는 셈이다. 아파트값이 크게 오르면서 지난해 전국에 지어진 다세대나 연립주택만 9000동, 10만가구가 넘는다.

환경부 관계자는 “처벌 관련 유예기간의 경우 당초 입법과정에서부터 들어 있던 내용으로 중간에 수정한 것이 아니다”라며 “100세대 미만 연립 등의 경우 사각지대에 있다는 우려가 있지만, 자재 공급업자들에 대한 사전심사를 엄격하게 적용해 문제를 해결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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